around - 이것만큼은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민트페이퍼  |  2015-01-06 12:24:34  |  7,824





AROUND MAGAZINE
여행,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 힐링이라는 주제로 우리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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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 출처 l AROUND MAGAZINE


이것만큼은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Do more of what makes you happy


이력서를 쓰던 시절이 생각난다. 하얗게 비어있는 표에 많은 걸 채워 넣어야 했는데, 그중 애쓰지 않고 적었던 건 '이름'과 '취미'뿐이었다.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이름을 빠르게 적고, 취미 칸에는 대충 '독서, 영화감상, 등산' 같이 무난한 걸 써넣었다. 우습게도 그땐 '필요 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억지로 채워가던 것들을 요즘은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사람과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

에디터·포토그래퍼 선아 어시스턴트 이현아



그냥, 해보려고

동네 친구가 있었다. 퇴근길에 혼자 밥 먹기가 싫어지면, "우리 집에 와. 밥 먹자."라고 연락하는 사람. 걸어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 있어 좋았다. 적적한 날엔 집 앞 공원에서 맥주도 마시고, 영화나 드라마를 같이 보기도 했으니까. 그런 일들로 괜찮은 나날을 보냈는데, 그녀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 목공을 배우려고." 문득, 한동안 반복해서 들은 말들이 생각났다. 연차가 쌓일수록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고 했던가. 책임감이 필요한 업무와는 다르게 힘을 풀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동호회 사이트나 헬스장 전화번호를 뒤지며 그 '무엇'을 찾고 있던 것은 알았지만, 목공이란 답은 의외였다. 친구는 속옷 디자이너였고, 나무를 만지는 법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왜 하필 목공이냐는 물음에 "그냥, 해보려고. 같이 할래?"라고 되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에겐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놀기만 해도 근무 외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그녀는 왜 뭔가를 하고 싶어 했을까.



나도
그냥, 해보려고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친구 없이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금세 익숙해졌다. 그 틈에 친구는 톱질이 익숙해졌는지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걸 몇 개씩 만들었다. 그걸 보여주는 얼굴엔 이전엔 볼 수 없던 생기가 돌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새로운 일'을 고민하는 것은 어느새 내 몫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고 그걸 즐기는 과정을 지켜봐서일까. 꽤 괜찮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공방으로 향하는 친구의 기분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냥, 이란 이유로 시작해 볼 만한 일이 내게도 있을까?' 고민을 이어가다 천천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창문에 붙여놓은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얼마 전, 마음에 들어 구매한 만 원짜리 포스터. 그 안에는 레옹과 마틸다가 꼭 끌어안고 있는 그림이 있었고, 한참 그걸 바라보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림을 그려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는
질색인데


그 생각을 하고도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일러스트 수업과 관련한 포스터를 하나 발견했다. '이 수업에 참여하고 싶다면, 조금은 느리게 걷기를 권합니다. 느슨함과 여유로 시대를 역행하시겠다는 일념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수업 시간만이라도 이런 정신상태를 유지해 주세요. 그래야 주변의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 비로소 빛을 내며 뚜렷하게 보일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자세한 수업 커리큘럼은 확인하지도 않고 수업을 등록했다.

기다리던 첫 수업, 선생님은 '자기소개'를 하자고 했다. 어딜 가든 이런 모임에선 자기소개를 빼놓을 수 없다. 내 소개가 귀찮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를 듣는 것도 별로였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슬쩍 보니, 모두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의 얘길 듣는 건 재미가 없을 게 빤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충 듣길 시작했는데, 몇 분이 지나고 실수를 했단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겐 이곳에 앉아있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수업의 유일한 남자인 아저씨는 잠시 일을 쉬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문학 선생님인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 출판사를 다니는 편집자, 몸이 아파 요양 중인 사람의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교실을 다시 둘러보니, 처음의 마음이 부끄러웠다. 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사냥꾼에게 쫓기다 잠시 나무 뒤에 숨어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뿐.



안간힘을 쓰면
연필심이 부러지니까


매회 강의는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좋아하는 사진이나 그림을 찾아오고, 그걸 다양한 재료로 따라 그렸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처음엔 쉽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사진을 보고 그리면 되는데, 옆 사람을 곁눈질했다. '저 사람은 얼마나 잘 그릴까', '내 것을 비웃진 않겠지?' 깨끗이 깎아온 연필을 부여잡고 '잘' 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연필심이 부러졌다.  놀라서 한참을 부러진 연필심을 보고 있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찰나, 선생님이 멀리서 모두에게 말했다. "너무 똑똑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부러진 연필을 필통에 넣고 덥석 붓을 들었다. 밑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지만, 부러진 연필을 부여잡고 남은 세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붓을 들고 마음이 가는 대로 마구 움직였다. 숙제도 아니고, 업무도 아니고, 시험도 아니니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완성하지 않아도 되고, 이걸로 뭔가 이뤄 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노래를 부르고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주고 싶다. 그건 돈이나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든,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든, 지금 어디에 살고 있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 대니 그레고리, 《창작 면허 프로젝트》 중



제법인데

점점 낯선 재료들은 익숙한 것이 되어갔다. 스스로 '이 그림은 괜찮은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은 가방에 챙겨놨다가 다음 날 사무실에서 꺼내 들었다. "이거 요즘 제가 미술학원에서 그리는 건데..." 하면 동료들은 그림을 봐주었다. 간혹 "정말 선아 씨가 그린 거 맞아?"라고 물으면 흐뭇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아쉬움이 남을 땐, 그들의 얼굴을 그려 보냈다. 한동안 친구들의 메신저 사진이 내 그림인 걸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나쯤 잘해내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은 나를 들뜨게 했고, 틈틈이 그린 그림이 쌓여가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제법인데?'

즐거웠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즐거움. 그렇게 한동안 들떴고, 두 달 간의 수업은 금세 끝났다. 심화과정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을 찾아볼까, 하다가 관뒀다. 수업은 끝났지만, 요즘도 종종 심심하면 펜을 꺼낸다. 최대한 팔목에 힘을 풀고 그리고 싶은 것을 마구잡이로 그려낸다. 그러다 손에 힘이 들어갈 땐, 자신에게 다그치듯 말한다. "이것만큼은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



혼자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면

혹시 나처럼 그림 그리기를 도전해보고 싶지만, 학원에 다니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책을 준비했다. 스케치북을 놓고 자리에 앉으면 어딘지 막막해지는데, 이 책들은 그런 마음을 잘 이해해준다.

01. 연습장 시리즈
유모토 사치코 | 한빛미디어 | 112쪽 | 148x210
색칠공부 책처럼 쉽고 재미있게 그림 그리기를 소개한다. 작가의 그림 자체가 단순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있어 그걸 따라 그리다 보면, 사람이나 동물을 귀엽게 낙서하듯 그릴 수 있는 재주가 생기기도 한다. 연필 하나를 들고 이 책을 옆에 두고 끄적거리면, 몇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02. 창작 면허 프로젝트
대니 그레고리 | 세미콜론 | 216쪽 | 188x257
저자는 회사원이었다. 취미로 그림을 시작했는데, 그게 새로운 일이 되어버린 케이스다. ‘창작 면허’라는 것은 작가가 그림 그리기를 운전면허를 따는 것과 비교한 데서 나온 용어다. 그리고 그걸 면허를 따듯 누구나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고 격려한다. 빈틈없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03. 색연필 스케치북 시리즈
아키쿠사 아이, 별사탕들 | 팩컴북스 | 130쪽 | 188x257
수업재료로 색연필을 샀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이 책은 색연필의 종류부터 사용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어 유용했다. 색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따라 그리다 보니 마지막엔 책에 나오지 않은 색이 들어간 그림도 제법 그릴 수 있게 되었다.

04. 낙서 마스터
요리후지 분페이 | 디자인이음 | 175쪽 | 150x170
소개하는 네 가지 중 가장 웃긴 책이다. 저자에게 엉뚱한 구석이 있어 그림 그리는 일을 재미있게 해석한다. 선 하나에도 표정이 있다고 말하며 선들을 의인화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우습게 표현하기도 한다. 딱히 그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화책을 보듯 편하게 보기에도 좋다.


내가 들은 그림 수업

수업 소개글에 반해 무작정 신청했던 수업 이름은 ‘익숙함을 그리다’.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며 수강기간과 시간은 때마다 다르다. 뭔가 거창한 걸 배워보고 싶다면 이 수업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일상 속의 사소한 것들을 끄적거릴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싶다면 괜찮을 것 같다. 이 수업을 듣는 시간만큼은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잊고, 잠시 나에게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수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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